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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협주곡과 사망

by 보오물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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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바흐가 만든 협주곡입니다. 이 곡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바흐와 프리드리히 2세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또 바흐가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출처 픽사베이

1.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 Concertos)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유명한 바흐의 협주곡이다. 여기서 '브란덴부르크'는 당시 프로이센의 왕자인 크리스티안 루트비히를 말한다. 이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 화음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여기에다 바흐는 프랑스 춤곡의 양식까지 접목시켰다. 그래서 이 협주곡에는 오케스트라와 현악기, 관악기, 건반 악기까지 악기 각각의 특색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모든 악기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들으면 웅장한 느낌이 든다. 그중에서도 특히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의 1악장은 최고의 완성도를 보인다. 1악장에서는 바이올린이 전체 음악의 중심을 잡는다. 그리고 2악장에서는 바로크 리코더가 곡을 주도한다. 그래서 서정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3악장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장엄한 분위기의 곡이다. 여기서는 바이올린과 관악기의 조화를 볼 수 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은 4번처럼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는 곡이다. 이 곡은 오케스트라와 플루트 그리고 바이올린까지 모두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하프시코드 악기도 사용되어 곡이 더 화려해졌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5번에서는 하프시코드 연주의 솔로 부분이 있다. 하프시코드의 솔로 연주는 힘차고 발랄한 느낌을 만들어 준다. 협주곡 5번은 이러한 다양한 악기들이 서로 잘 어우러져 있는 곡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곡은 처음부터 유명한 곡은 아니었다. 이 음악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20세기 음반 녹음을 하고서부터이다. 

2. 바흐와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의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이다. 그는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나라를 문화대국으로 만드는데도 힘썼다. 그래서 그의 궁전은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와 작가, 학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플루트 연주가였다. 게다가 작곡까지 할 수 있었다.

1747년 그는 바흐를 자신의 궁전으로 초대했다. 이 당시 바흐는 노령에 접어들었다. 바흐와 프리드리히 2세는 삶부터 음악까지 전부 대조적이다. 바흐는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를 따랐다. 그리고 예술적인 면과 관습적인 면에서도 구시대적 사고를 보였다. 그리고 음악을 신에게 바치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바흐는 교회 음악의 신봉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기존의 유럽 문화 대신에 새로운 사상을 추구했다. 그는 신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인간을 중시했다. 그는 정략결혼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아내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청년들과 귀족 자제들과 더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자식이 없다. 이 때문에 그가 죽고 그의 조카가 후계자가 된다.

프리드히리 2세는 최근 구입한 포르테피아노를 보여주기 위해서 바흐를 초대했다. 포르테피아노는 소리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이다. 바흐는 포르테피아노를 보고서 칭찬했다. 그리고 왕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프리드히리 2세는 바흐에게 곡을 부탁했다. 부탁한 곡은 단순한 선율로 만들어진 곡이 아니었다. 매우 까다로운 선율로 이루어진 곡을 부탁했다. 바흐는 주저 없이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곡을 만들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바흐는 곧바로 곡을 만들었다. 곡을 만드는 데에는 2개월이 소요되었다. 이 음악이 바로 '음악의 헌정(Musical Offering)'이다. 이 작품에는 3성 푸가와 6성 푸가 그리고 10곡의 캐논, 소나타가 들어있다. 

3. 바흐의 죽음

'음악의 헌정'을 완성하자마자 바흐의 건강은 나빠졌다. 바흐의 시력은 급격하게 나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바흐는 담배와 술도 즐겼다. 바흐의 생활은 건강한 생활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현대 연구가들은 바흐에게 당뇨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750년 봄에는 바흐는 시력을 거의 잃었다. 그는 영국인 안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그 의사는 환자의 눈에 바늘을 꽂아 피를 뽑는 치료를 했다. 그리고 그 당시 안과 의사들은 수은을 소독제로 사용했다. 그래서 의사들은 환자에게 염증의 징후가 있을 때마다 수은으로 병들을 치료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수은은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바흐도 심각한 수술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완전히 실명하게 된다. 거기에다 그 해 여름에 바흐는 고열에 걸렸다. 고열이 오래가서 바흐는 병상에 누워만 지냈다. 이렇게 바흐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 65세 나이에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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